영화 같은 삶은 싫다

박정민 선배의 "쓸 만한 인간"을 읽고




 서점에 방문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참 비합리적인 행동일 지도 모른다. 온라인에 비해 할인 폭이 크지 않고, 원하는 책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이 여태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치 못한 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만남이 서점 운영자의 고도의 마케팅 전략일 수도, 혹은 정말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민 배우,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님의 수기집은 나에게는 우연이었고 원나잇 스탠드였다. 


 내가 졸업한 한일고등학교는 시골에 있는 전교생 기숙학교였다. 한국의 이튼스쿨을 표방하며 전교생 남학생으로 구성되었던 나의 학교는 사교육이 없고, 교복이 없고, 교문이 없는 등 다소 진보적이면서도 지리적 폐쇄성으로 인하여 보수적이기도 했던 학교였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 덕분에 항상 경찰대 최대입학, 정원 대비 50% 의대-치대-한의대 진학 등의 엄청난 대입실적을 보이면서도 또 예술가의 길을 걷는 친구들도 많은, 지금 생각하면 참 특이한 학교였다. 그 중 박정민 선배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했을 것이다. 박정민 선배는 아무래도 주변환경에 휩쓸려 고대에 진학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자퇴를 하고 한예종에 진학한 이유는 자신의 calling에 응답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글에 선배 이름과 한일고를 검색해보니 이 글이 나온다. 서울대, 연고대를 가는 것이 미덕인 학교에 이런 글을 올리는 이단아, 그러면서도 학교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한일고 졸업생이 아니라면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선배의 수기집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발견했다. 선배의 연기는 많이 보지 못해도 이름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선배의 수기집, "쓸 만한 인간"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3년에 걸친 글과, 또 3년 후의 개정판이 엮여진 이 책은 선배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적어간 글을 모아둔 것이다. 나는 수기집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유는 소설보다 더 현실적이며 자기개발서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적어내려간 글을 읽다보면 어느순간 작가와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 순간을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동경하는 나이기에 수기집을 읽는 행위는 작가의 삶을 잠시나마 살아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공감하고, 때로는 배우며 수기집을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남은 말은 "영화 같은 삶은 싫다"라는 것이다. 영화배우가 영화 같은 삶은 싫다니, 그러나 영화 같은 삶을 상상해보라. 또 내 삶이 한국전쟁을 겪는다면, 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면, 혹은 일제강점기를 겪는다면, 지금의 나는 나의 꿈을 위해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해병대에서 실전 상황이 있던 적에 유서를 미리 썼던 적이 있다. 죽음을 각오하며 출정을 준비했을 때였는데, 그 때는 정말 내가 왜 시대상황에 의해 희생되어야 하는가 아파하며 나의 시대를 저주했다. 그리고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을 때에는 순국선열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기도 하였다. 영화 같은 삶은 싫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의 인생은 남들이 살아보지 못한 영화의 삶이다. 비록 드라마틱한 (특히 한국 특유의 막장틱한) 삶은 아닐지 몰라도, 나의 삶 또한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나의 영화 장르는 액션이나 호러, 공포, 컬트, 판타지, 멜로보다는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다큐멘터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래는 깊은 울림을 준 선배의 글귀를 모아두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정민 선배와 술한잔 하고싶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다. 거기 계셔 주셔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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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같은 삶은 싫다.

- 당신의 인생도 남들이 살아보지못한 영화의 삶을 살고 있다.

- 유명해지기 위해 사용할 에너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듯이 절실히, 긴 호흡으로 내일 아침엔 좀 더 전투적으로 일어나라

- 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놈

- 영화에 인생을 걸지 말고 그 영화를 같이 찍는 사람에게 인생을 걸어라

- 단편적인 사실만 나열하게 되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

- 그저 응원할 뿐이다.

- 현재의 내 삶에는 어지간히 많은 이름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 인터넷에 글을 쓰는 이유, 어쩌면 이 감정이 나만 겨끈 건 아닐꺼라는 일종의 희망에 기대어 쓰는 듯

- 당신에게 물려받은 근성

- 어쩌면 지구는 타노스의 숙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쉬리, 동주, 변산, 블랙 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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